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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두 개의 방> 김경화 개인전

_  y : 관리인 노수인 <장미와 소행성과 유리덮개와 김경화> 

 

<1> 장미 화원

 

 보통 직장인의 노동 시간은 하루 8시간, 외출준비와 출퇴근 2시간 정도를 합치면 약 10시간. 그리고 하루에 7시간 정도는 잠을 자고, 3끼니 식사에 2시간 정도를 쓴다.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자신의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보통 하루 5시간 정도쯤 되지 않을까. 일하는 시간의 절반 정도다. 게다가 모든 직업에서 그런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 하루 5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상당수는, 노동을 제외하면 자신의 삶이 거의 없다. 

 ‘노동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노동을 제외할 수 없다. 삶이란 노동 후 남는 시간에 만끽하는 어떤 자유로운 시간들이 아니라, 일하는 매 순간순간이 곧 개개인의 삶 자체인 것이다. 먹고사는 것과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시키면 삶이 사라진다.

 

 아름다움이란 진공에서 뚝딱 튀어나오지 않는다. 삶에서 우러나오고 추출된다. 삼단논법으로 보자. ㉠노동은 삶과 같다. ㉡아름다움은 삶에서 우러나온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노동에서 우러나온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가치들이 아름다운만큼, 정확히 딱 그만큼 노동하는 민중의 삶 역시 아름답다. 매일매일 지겹게 반복되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어도, 그래도 모두 아름답다. 화원의 무수한 장미들이 모두 하나하나 아름답듯이.

 

 

<2> 소행성 B612  

 

 예술과 노동 현장의 관계는 다양하다.

 예술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초월하는 자율적 가치라는 발상은 요즈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말로 뱉기엔 촌스럽다. 하지만 그 전통에 직/간접적으로 뿌리를 둔 듯 보이는, 작가란 노동자와 조금 다른 차원의 직업이라는 생각은 자주 접한다. 노동 현장은 예술의 뮤즈이자 원천인 것이지 예술 행위 자체가 노동은 아니라는 인식. 노동 현장을 보고, 듣고, 느끼고, 표현하는 자는, 그 당사자성에서 한 발짝 물러서있는 외부 관찰자라는 인식. 흔하다. ‘예술은 단순한 노동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작가도 직업이고, 예술 행위도 노동이라는 말도 자주 한다. 작업에 노동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요청하는 이 인식은 예술 내부적 담론의 차원에서도, 예술 외부에서 예술가의 실용적 필요에 의해서도 모두 등장한다. 삶과 예술이 동일시되어 결국 모든 삶들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미학적 방향성은 많은 예술 운동들에 전달되어온 유서 깊은 전통이다. 존중할 수 있는 논리가 있다. (다만 이것은 예술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제도화하고자 할 때에 흔히 나오는 말이기도 한데, 이 경우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바와는 좀 다르다.)  

 

 “예술은 그냥 노동하고는 다르잖아요”와, “예술도 노동인데 똑같지 뭐” 사이에서, 현재의 예술은 그때그때 자리를 바꿔가며 진동하고 있는 듯하다. 노동과 예술은 동일시 되는가? 아니라면 서로 외연이 다른 별개의 내포인가? 또 아니라면 교집합을 공유하는 관계인가? 어떤 노동은 예술이 되는가?

 화원의 무수한 장미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어린왕자의 고향별 소행성 B612에서는 어떤 한 송이의 장미가 특별해진다. 화원의 장미들처럼 하나하나 모두 아름다운 노동하는 삶들 중에서 어떤 것이 예술의 범위에, 소행성 B612에 들어가 ‘특별한’ 장미가 되는걸까?

 

 

<3> 유리 덮개

 

 운명의 상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 공간과 전 역사적 시간을 생각했을 때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은 먼지에, 찰나에 불과하다. 마주치는 인연 역시 매우 한정적일 것이다. 그 한 줌 밖에 안 되는 인연들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마치, 고르고 골라서 그 사람이 최고의 선택인 것처럼, 완벽히 딱 맞게 짝지어진 것처럼. 

 하지만 확률적으로 생각하면 허무맹랑한 얘기다. 어떤 상대가 특별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쌓여야 한다. 수많은 기승전결, 에피소드, 희노애락이 필요하고, 그것을 새겨낼 시간도 쌓여야 한다. 인내와 애정이 필요하다.

 

 사람 뿐만 아니라 삶도 그렇다. 평범한 삶의 모습들 중 ‘어떤’ 시간과 행위가 특별해지려면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인내와 애정을 유리 덮개라고 불러보자. 비바람을 막고 소중히 아껴서 ‘어떤’ 장미꽃을 특별하게 만드는 과정. 아름다움이 무수히 피고 지는 화원 같은 우리의 터전에서, ‘어떤’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과정. 소행성 B612에 들어가는 특별한 장미꽃은 누군가가 씌워준 유리 덮개를 가져야 한다. 

 

 

<4> 김경화

 

 어린 왕자는 장미꽃과 다투고 소행성을 나왔고, 다시 장미꽃 곁에 있기 위해 소행성으로 돌아갔다. 익숙한 구조다. 작가들은 피와 땀이 서린 노동의 시간들 때문에 예술을 떠나고, 또 그 시간들 때문에 예술로 다시 돌아온다. 

 작가 김경화는 유리 덮개를 씌우는 사람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① 먼저, 그는 모든 노동 현장들의 각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작업을 통해 어떤 현장은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혹은 시대에 요구하기 위해 일터에 생을 쏟아부은 노동자와 열사들, 골목마다 즐비한 간판과 셔터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먹고 살기 위한 미싱기가, 폐박스가, 무명천이, 공구가, 어떻게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타인의 삶과 노동에 인내와 애정이라는 유리 덮개를 씌운다. 어떤 삶이 뿌리내린 지점을 예술의 영토로, 소행성 B612로 만든다. 이 때에 그는 그 노동에서 조금 물러나 있다. 

‘예술은 노동과는 조금 다른 어떤 것이다.’ 

 

② 동시에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장미꽃에 스스로 유리덮개를 씌우는 사람이다. 노동은 영감의 원천이며 동시에 작업 자체이기도 하다. 김경화의 작업 행보는 노동 현장을 그저 관찰하는 것을 넘어 종종 스스로가 그 현장에 녹아들어갔다. 작품 제작 과정에 끈질긴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전시 공간이 아닌 노동 현장에서의 커뮤니티 활동들을 보아서도 그렇다. 현장에서 두 발을 담근 채 노동을 집약해서/노동의 방법론을 재현해서 작업을 한다. 예술과 노동의 간격이 매우 얇고, 스스로 노동하는 시간들을 그 자체로 예술로 만든다.

 ‘노동의 과정과 방법론이 곧 예술이 된다.’ 

 

 김경화의 작업 안에서 예술과 노동을 일치되었다가 어긋나기를 반복하는 듯 보인다. 

 두 영역을 오가는 진동 폭은 그 자체로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재미있는 패러독스를 보여준다. 이 진동 폭을 그대로 즐기며 작업이 뻗어갈지, 한 쪽을 과감히 선택할지, 혹은 두 영역의 극적인 화해를 보여줄지, 혹은 이 두 영역 외에 다른 어떤 맥락이 또 엮여들지, 등등,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①과 ②라는 서로 다른 두 방향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분절을 내비치는 이런 지점이, 김경화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필자가 찾은 유연한 ‘경첩의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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