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실패하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박자현 개인전
_ y : 관리인 노수인 <제 몸에 호흡구를 뚫으려 작품은 스스로 모습을 바꿉니다.>
호흡은 체외의 산소를 마시고 체내의 이산화탄소를 뱉는 가스교환을 통해 생명체가 에너지를 얻는 과정입니다. 끝없이 자기 신체 바깥의 외부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다는 점은 여러 상상을 파생시킵니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서만 순환하며 고립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내부’, ‘고립’ 같은 낱말들은 우리 미술인들에게 굉장히 친근하지 않나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제가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우리 미술인들’이라 불렀는데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바로 당신^^)가 아마도 내부인일거라고 상상하며 쓰고 있습니다. 한 미술 작가의 작품 세계에 관한 글을 미술과 관련 없는 어떤 외부인이 읽고 있는 상황을, 그 경로를, 저는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내부에 고립된 것은 살아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미술 자체가 지금 질식사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비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미술 작가들의 우울감과 무력감, 외로움, 자괴감은, 질식에 따른 표면적 증상 중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호흡 불가 상태에선 한 모금의 산소가 간절합니다. 그래서인지 박자현의 작업들은 외부와 호흡하기 위해 자기 몸에 호흡구를 뚫습니다. 저는 호흡의 양상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는 두 가지 호흡구의 형태를 비교해보려 합니다.
① 단계 : 점과 점 사이의 빈 공간으로 산소빨대를 꽂기
박자현 작가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점묘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점’이란 뭐고,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의 점은 다른 점과 간격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점선이 반쯤 존재하는 선이듯, 점-면은 반투명한 면입니다. 이미지 뒤로 다른 공간이 어른거리며 비쳐 보이기에 중층 레이어를 만드는 벽입니다. 보는 사람과 이미지를 출발지와 목적지로 대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뒤 쪽에도 존재하는 공간-길-통로를 암시하며) 이미지를 시선의 최종 목적지에서 중간 거점으로 변신시킵니다.
이 지점은 뿌연 담배 연기를 뿜고 있거나 우유를 뒤집어쓴 인물상들에서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연기 혹은 우유의 흰색에 자신의 면적을 양보하며,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을 확대해 캔버스의 흰 배경에 보다 투명도 높게 녹아듭니다.
박자현은 구멍이 숭숭 뚫린 이 반투명의 벽으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줄타기하며 실제로 이 사회의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을 그려냅니다. 고통 받는 존재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존재가 (반)투명해지는 고통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방향성의 연장에서, 점과 점 사이의 틈새로 이미지가 투과시키는 뒷 풍경에 캔버스의 흰 여백면이 아니라 실제 먼지 묻은 공간을 놓고, 더 더 생생히 실재하는 먼지 품은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지는 것은 일종의 다음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존재 면적에 구멍을 뚫고 틈새에 빨대를 꽂아 공기를 마시는 것보다 더 큰 심호흡을 하기 위해, 박자현의 작업은 관절을 크게 꺾어 한 번 전환점을 만들게 됩니다.
② 단계 :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바깥 먼지 들이마시기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해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작가는 말했습니다. 타인의 고통과 연대하기 위한 호흡을 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마시는 공기를 직접 함께 호흡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연대란 홀로 깨끗한 곳에 서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기를 마시며 그 안에 섞인 먼지들도 함께 마셔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박자현 작가는 캔버스와 전시장을 벗어나 밖으로도 나가게 됩니다. 재개발 지역, 성매매 집결지의 동물들을 통해 그곳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작업들이 등장하고, 현장에 직접 설치하는 방식이 두드러지게 잦아집니다.
작가는 현장 설치 작업과 함께 미술 작가라는 자신의 위치가 가지는 이중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대구시 정책으로 자갈마당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그 근처의 대구예술발전소에서 대구시의 지원을 받으며 자갈마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작가인 자신은 어떤 위치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작가’라는 이름이 갖는 딜레마는 2018년의 전시 ‘파트타임 스파이 예술공간 주름제거술’이라는 제목에서 강렬히 드러납니다. 약자들의 현장을 밀어내는 문화 정책의 수혜자인 ‘작가’이자, 약자들과 연대하고 고통을 조명해 목소리를 싣는 ‘작가’, 상반된 역할을 동시수행하고 있는 자신을 ‘스파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시간의 증거로서 새겨지는 ‘주름’을 제거하는, 실재하는 고통을 아름다움의 관념으로 가리는 기술로서의 미술, 그리고 삶을 온전히 한 방향에 몰입시키지 못하고 일상과 예술을 오가는 ‘파트타임’ 작가, 이 제목 안에는 미술 혹은 자신에 대한 냉소가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먼지를 함께 마시는 호흡을 통해 함께 고통을 나눔으로써 고통에 연대할 수 있겠으나, 냉정히 말하자면 같은 현장에 발을 디딘 것이 아니라 전시장에 한 발을 걸쳐놓은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쨌든 작품은 전시장 안으로, 포트폴리오 속으로 들어오고야 말았으니까. 전시장에 박제된 작품이 현장성을 잃고 현장을 미학화 해버린다는, 오랜 역사를 지닌 딜레마가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습니다. 전시장 바깥으로 몸의 반 정도를 내민 상태랄까요? 창문틀에 상체를 걸치고 바깥 공기를 호흡하는 상태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있기 위해, 고립되어 죽지 않기 위해 바깥의 공기와 먼지를 함께 호흡하고자 박자현 작가는 과감한 작업 매체의 전환을 보여주었습니다. 점점 더 작품은 제 몸에 호흡구를 크게 뚫어 전시장 바깥을 들이마시고 있는데, 이 이후에 ③ 단계가 있을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힌트들을 그러모아 상상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