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비어있는, 가득찬, 고여있는, 흐르는, 무너지는, 쌓이는, 정지된, 이탈하는,> 왕덕경 개인전
_ z : 관리인 이봉미 <조용한 거부_그림자>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이 회화 작품의 시작이라면, 작가는 어떤 것을 그리려고 선택하게 될까? 추상적으로 그리는 방법도 있지만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그린다고 가정했을 때, 대게는 나의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내 주변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물색할 것이다. 오늘 내가 본 풍경, 가까이 있는 사물, 사람 등등... 사물이면 양감이나 색, 세부적인 요소를 그리려고 노력한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선택해 그린다는 것은 회화에서 요구되는 사항 중 하나다. 무엇을 그려라, 그려서 드러내라, 특히나 대학 때, 또는 졸업 시기쯤 뭔가를 그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물론 모두 그렇진 않지만, 그려내는 대상이 내 이야기를 드러내야 함을 강요 받기도 한다.
왕덕경 작가의 작업을 쭉 놓고 본다면 그림자가 등장하는 그림은 상당히 초창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유화로 그려진 풍경 속에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배경과 함께 그려지기도 하고 영상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투사되기도 한다. 후에 그림자는 배경 없이 단독으로 그려진다. 자유로운 형태의 그림자 이미지는 대상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드러내라는 회화의 고리타분한 요구를 살짝 비튼다.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반감, 내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서 그림자는 등장한다. 사실 그림자는 상당히 애매한 대상이다. 색도 없고 원래 가진 형태도 변형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나타내지만 직접적으로 대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림자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한다는 특성을 지운다. 그림자는 존재하는 실체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부재를 통해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그곳에 있다는 것, 존재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그림자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드러내길 저항하는, 선택된 대상이다. 실체를 지운 그림자, 그 부재를 통해 존재함을 의미하는 그림자는 나를 드러내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작가의 전반적인 작품 활동에서 그림자는 초기에 등장하지만, ‘사회에서 요구되는 틀’에 저항하는 의지는 계속 연결된다. 그림자 작업은 대게 콘테와 목탄, 종이를 잘라 작업했다. A4를 잘라서 작업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작품을 보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정해진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 육면체”는 그림자, 모래로 이어진다. 아무런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빈집이 생동하는 식물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것처럼, 미묘하게 변화하는 흔적을 통해 존재를 확인한다. 흔적은 틈을 내고 시선을 준다. 세밀한 변화 속에서 포착되는 잔잔한 시선은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조용히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