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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비어있는, 가득찬, 고여있는, 흐르는, 무너지는, 쌓이는, 정지된, 이탈하는,>  왕덕경 개인전

_  x : 관리인 김수정 <여성, 예술가임을 증명하기

 축이 휘어지는 순간이 분명 있다. 삶의 큰 변화를 겪었을 때나, 사소한 변화인 듯했지만 그 변화들이 점점 쌓이고 쌓여 나를 바꾸어나갈 때. 일반적인 인간의 생애에서 반복되는 흐름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다가오는 깊이의 차이를 느낄 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확장되는 순간을 작가는 계속해서 마주한다.

 삶의 축이 갑자기 꺾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시간을 따라 마치 정해놓은 어떤 곡선이 있는 것처럼 차례대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다가오는 파도를 그저 맞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내 그 파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축을 휘게 만든다. 각자에게 다른 방식과 형태로, 삶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왕덕경 작가의 작업은 정육면체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형태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형태를 유지한다. 정육각형의 세계는 그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한 개인이 자라나면서 겪는 경험들은 내부와 외부의 변화를 맞으며 묘한 형태적 변화를 일으킨다. 정육면체의 내부에서 서성이던 인물들은 비어있는 오래된 집을 만나며, 가지를 뻗어 내고, 이차원적 이미지에서 삼차원의 조각으로 형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드러낸 육면체는 단단한 모습을 하고도 부서지는데, 왕덕경 작가는 이렇게 형태를 만들고 부수어 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각들을 담아내던 정육각형은 <63일간 주 2회 킴스아트필드미술관으로 출근합니다.>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바뀌어버린 생애사를 받아들인다. 미술 작업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작업을 수행하는 예술가이자 예술노동자로 지내왔던 작가에게 '엄마'라는 돌봄 노동이 생기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작업을 위한 노동은 하나의 '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이 생애의 격변기는 이전까지 계속해왔던 작업이라는 작가의 일을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예술가로서 묵묵히 작업을 펼쳐오던 작가는 엄마라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 씌워진 현재, 작업하는 노동의 시간을 사회가 용인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출근'을 시작한다. "직장도, 임금도 없는 '작가'.''라는 작가의 말처럼 가장 바깥으로 밀려난 작가의 노동을 인정받기 위해 작가는 전시장으로 출근한다.

 돈을 버는 형태의 노동만이 진정한 노동으로 인정받는 이 세계에서 예술노동은 계속해서 뒷순위로 밀려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계속해서 작품을 만드는 노동을 반복하고, 전시한다. 왕덕경 작가의 작업은 모래를 다지고, 쌓고, 굳혀서, 다시금 부서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던 방식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노동 형태 그 자체를 전시하는 이 전시를 통해, 예술가의 작업, 노동, 그리고 엄마 됨에 대해 질문이 시작되면서 육면체는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예술가의 엄마 되기를 다룬 <자아, 예술가, 엄마>는 예술을 지속하면서 엄마가 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직도 공공연히 성차별이 이루어지는 예술계에서, 여성이자 엄마가 된 이들의 예술을 지속하기는 세계와의 새로운 투쟁을 만들어낸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로 인해 여전히 예술계 내에서 작업을 열심히 하는 '엄마'는 한 명의 예술가이기 이전에 가정에 소홀한 여성으로 곧잘 치부된다. 커리어만을 생각하는 비정한 엄마가 되는 여성 예술가에게, 무너지는 육면체를 계속 쌓는 작업은 세계를 향한 투쟁이자, 다음으로 가기 위한 수행이 된다. 

 

 하나의 방향이 어떤 곡선을 그리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묘한 선들이 새로운 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발이 떼 지기 시작한다. 기존의 작업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작가는 달라진 생애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 수행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어디에 이 소리가 전해질지를 확답할 수 없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축의 방향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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