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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비어있는, 가득찬, 고여있는, 흐르는, 무너지는, 쌓이는, 정지된, 이탈하는,>  왕덕경 개인전

_  y : 관리인 노수인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자는 진동하고 있다.

 초능력자물을 보면, 시간을 멈추고 주인공이 혼자만 움직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멈춰 있는 사람은 수동성이 극대화된다. 그들에겐 뭐든 할 수 있다. 콧구멍 찔러보기, 옆구리 간지럽히기, 위아래로 훑어보기... 일종의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주인공은 세계의 문법에서 분리되어 세계를 관음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생각해보면, 전시장에서 가만히 멈춰있는 그림과 조각을 마음껏 관음하는 우리들도 그렇다. 작품 하나를 멀리서도 쳐다보고, 옆으로 기웃대면서도 보고, 한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지만 작품은 정말 멈춰 있나? 물리학에서는 모든 입자는 진동하고 있다고 한다. 고체도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 열에너지가 적어서 기체와 액체에 비해 분자 진동폭이 좁을 뿐 열에너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극도로 작게 진동하는 것 것이라 한다. 우리는 전시장에서는 수동적으로 박제된 듯 작품을 대하지만, (영상/키네틱에서 시간이 구간을 단순 반복하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실은 그 안에서도 천천히 시간은 흐르고 있다. 왕덕경 작가는 모든 작품에는 미세하게 졸...졸... 흐르는 미시적 시간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직시시킨다.

 

 각 잡힌 육면체의 모래더미는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알갱이들은 매 순간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다. 움직임의 규모가 미세할 뿐. 모든 분자는 진동하고 있다지만 우리 눈에는 분자가 보이지 않는데, 그 모델을 고운 모래알 사이즈로 확대해놓은 것이라고도 보인다. 그 미세 운동이 서서히 균형을 깨트리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툭- 혹은 와르르- 틀의 귀퉁이가 무너져내릴 것이다.

 혹은, 글쎄, 어떤 완벽한 배열로 모래들을 쌓아놓으면 각 잡힌 모래 육면체가 10년이고 100년이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경우도 있을까? 신적 필연에 빗대어야할 그런 희박한 확률의 완벽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잠시 세계의 문법에서 이탈해 신적인 힘을 누리게 되듯, 어떤 시공간의 진동을 멈출 수 있으려면 잠시 신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속도/스케일로든 시간과 공간은 끊임없이 흐른다고, 우리는 결국 그 시공간 안에서 죽고 문드러질 운명의 필멸자라고, 왕덕경 작가는 암시하고 있다. 무너지는 모래더미를 통해 우리의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을 빨리감기로 보여준다.  

 

 삶과 죽음, 움직임과 멈춤, 변화와 불변, 이런 이분법적 대립항들에 인간의 염원을 담아서 연금술이 탄생했다. 연금술이란 단순히 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사실은 훨씬 더 심도 깊은 상징체계다. 금은 완전한 물질이다. 화학적 반응성이 거의 없고 부식도 되지 않는다. 영속성, 희소성, 활용성 모든 측면에서 매우 우수하고 아름답다. 금은 영혼이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완벽함의 경지, 영원불멸하는 신적인 것을 상징했다. 그래서 연금술은 금이 아닌 금속이 완전한 물질인 금으로 바뀌듯, 불완전한 우리의 영혼을 신적 완전함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다. 

 연금술에서는 금속을 가열하여 금을 만든다. 이 때 사용하는 그릇을 <바스 헤르메티스>라고 부른다. 금을 만드는 과정에서 결코 흠집이 나서는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릇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물질 세계에 속한다. 결코 흠집이 나지 않을 수 있는 그릇은 없다. 왕덕경 작가는 막을 수 없는 변화와 그 끝의 죽음을 암시하는 모래 육면체에 <바스 헤르메티스>라는 제목을 붙였다. 신적 완전함에 대한 갈구와, 그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뒤섞여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스 헤르메티스>는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모래에 각을 잡아 만들어진다. 

 

 왕덕경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도 육면체는 등장한다. 하지만 이 육면체는 관념적으로 부피를 암시하는 평면적 드로잉이었다. 그리고 점차 실질적인 부피를 차지하는 실물 설치로 바뀌어간다. 모서리만 슬쩍 암시하던 선들의 집합에서(‘관계도’ 시리즈) → 선들로 둘러쌓인 육면체의 뚜렷한 면적에서(‘여섯가지의 틀’ 시리즈) → 조금씩 3차원의 부피를 갖고 부풀어오르는 부조를 거쳐(‘여섯가지의 틀’ 시리즈) → 마침내 실존하는 물질의 유동성을 직접 구현하는 ‘바스 헤르메티스’에 이르기까지. 가상적 이미지의 세계으로부터 시간이 멈춤 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세계로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세계의 문법에서 벗어나 관조하던 자리에서, 점차 세계의 문법이 직접 적용됨을 보여주는 지점으로, 움직임이 확대되어간다.

 다소 형식이 다른 듯 보이는 다른 작업들에서도 이 지점이 공통으로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작가가 전시장에 출퇴근을 하는 것, 그러니까 출근~퇴근 사이에 하루라는 시간이 지난다는 것, 퇴근~출근 사이에 다음 날이 된다는 것 (그렇게 날짜가 쌓인다는 것), 그 시간의 흐름을 전시가 기록하고 반영하고 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에 이끼가 자라게 내버려두고 그 과정을 작업에 포함시키는 것도 맥락이 비슷하다. 생장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작업 안에 반영하고 있다. 왕덕경 작가는 초기 작업에서 현재 시점까지, 작업 안에서 시공간의 변화와 움직임이 확대되는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점차 수동성을 탈피하고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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