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예술공간 영주맨션 기획초대전 - 경첩의 축
<목소리를 삼키고 달을 만나다> 김덕희 개인전
_ y: 관리인 노수인
*사진 속 작품: Falls ,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Japan 2009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잡히지만 보이지 않는...>
선물을 센스 있게 잘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느껴지는, 그리고 주는 사람과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선물요. 영화로 치자면, 알레고리를 함축하는 상징물같은 소품이랄까요? 그런 물건은 서사를 촉발시키는 트리거가 되기도 하고, 서사를 압축해놓은 아이콘이 되기도 하죠. 어떤 물건은 A와 B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A와 B 사이의 관계를 짧은 영화로 만들어줍니다. 이야기가 깃든 물건, 메시지를 머금을 수 있는 물질... 그리고 어쩌면, 마음을 발생시키고 파생시키고 전송할 수 있는 물질...
마음은 심장에? 뇌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심장이라고 한다면... 피가 오랜세월동안 생명력의 상징이었듯, 마음이란 원초적인 우리의 생명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이겠죠. 만약 뇌라고 한다면... 상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지적 능력에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겠죠.
어느 쪽이든 아이러니합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의 물질적 육신 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인 마음이 위치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점에서요. 아름답게 서사를 입혀둔 영화 속의 어떤 물건처럼,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만드는 잘 고른 선물처럼, 분자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에 관념이 기꺼이 깃든다는 믿음. 나아가 관념이 거기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요.
물질에 깃든 비물질인 마음을 다시 비물질의 세계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많은 종교에서 의례품들을 태우는 것에서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태우기. 정성껏 종이에 뭔가를 쓰고 태우기. 태우는 행위는 물질 세계의 대상을 하늘과 영혼들의 세계로 전달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합니다.
태우는 것은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질량은 곧 에너지라고 합니다. 다만 그 형태를 바꿔서 어떤 때에는 질량으로, 어떤 때에는 에너지로 존재합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질량에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에너지로... 하지만 사실은 이 두가지가 동일 존재라는 것이죠.
다시 돌아와서, 마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마음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습니다.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일종의 에너지라고 비유해볼까요? 에너지,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마음이 지닌 힘은 충분히 어떤 현상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죠.
질량과 에너지가 형태를 바꾼 동일 존재라고 한다면, 에너지인 마음도 질량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물건에 마음이 깃든다고 믿거나, 육신에 마음이 위치한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감히 유추해봅니다.
김덕희 작가의 작업에서는 마음이 물질을 입는다면 어떤 모습이 될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여러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주로 사용되는 소재는 열과 빛. 물화된 마음은 물질로만 존재하지 않고 에너지 형태로의 존재를 수반한다는 점이 특징적이죠. 김덕희 작가의 작품들은 고요해 보이는 모습의 이면에서 현상이 발생하고 에너지가 작용하는 지점들이 공존합니다.
열과 빛, 소재로 자주 쓰이는 이 두 종류의 에너지들은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보면 비로소 느껴지는 열에너지, 혹은 눈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실체를 만질 수는 없는 빛에너지... 보이면서도 만져지는 견고한 물질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예 인식이 불가능하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각이든 촉각이든 뭔가는 우리에게 힌트를 주니까요. 에너지가 작용하는 현상과, 그 현상을 촉발시키고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바탕으로써의 물질이 늘 공존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작업세계 전반에 흐르는 줄다리기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주 긴 밧줄을 머릿속에 떠올려 봅시다.
그 왼쪽 끝에, 우리의 육신이 있습니다. 흙과 돌과 나무와 물,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온갖 잡동사니등,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물질세계가 있습니다. 물질의 순환 속에서 먹고 자는 무한한 굴레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없이 긴 거리를 옆으로, 오른쪽 끝에 우리의 관념이 있습니다. 사소하고 잔잔한 감정들부터 우주의 신비와 원리를 고찰하는 철학들까지, 우리가 느낄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지각활동과 사고활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 밧줄의 중간 즈음에서 발생하고 머무릅니다. 왼쪽과 오른쪽 양 끝에서는 온전히 피어나지 못하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유동적으로 흔들리는 좌표지점이 마음의 고향이고, 마음이 존재(+작용)할 수 있는 토대입니다.
마음의 모양이란 어떤 모습이 적절할까요?
어떤 시각적 형상도 신기루같은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오감이 온전히 포착해내지 못한다 해도 마음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누구나 믿습니다. 보이든, 만져지든, 뭔가 하나씩만 허락하는 열에너지와 빛에너지처럼, 마음이란 우리에게 반쯤만 자신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 아닐까요?
김덕희 작가의 작업을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으면, 저는 이 풍경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존재를 상상하게 됩니다. 흩어진 빛 입자 속에 숨어있는, 따뜻한 돌과 쇠 속에 숨어있는… 숨어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존재. 마음이 어떤 형상을 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질로 견고히 존재하지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에너지와 현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이 심장이나 뇌에서 발생하고 머무른다면, 김덕희 작가는 우주와 세계의 몸인 돌과 쇠를 통해 마음을 나누려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